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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8.20 [00:05]
<특별기고> 유관순 열사 서훈격상운동에 적극 동참하자
 
편집부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는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유관순 열사는 조선의 잔 다르크(Sainte Jeanne D'arc)로 추앙받고 있다. 

 
▲     © 편집부
             
                           유관순 열사 근영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의 다섯 자녀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감리교도였던 유중권은 구한말 유빈기, 조인원 등과 함께 흥호학교를 세워 국권회복과 민족계몽운동에 나섰던 선각자였고, 어머니 역시 선교사들을 통해 독실한 신앙심과 근대적인 여성의식을 갖추었던 신여성이었다. 이런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유관순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나가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익혔고, 생활 속에서 식민지 체제의 부당함을 체험하면서 뚜렷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이문회(以文會)를 통해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나서기로 맹약했다. 3월 1일 드디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사람들이 학교 앞을 지나가자 유관순은 여섯 명의 동료학생들과 함께 담장을 뛰어넘어 시위에 동참했다. 당시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이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교문 앞을 막아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3월 5일에 벌어진 남대문역 시위에는 사상 최대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강기덕, 김성국, 김원벽, 한위건 등 학생대표들이 앞장선 가운데 이화학당의 유관순과 정신여학교의 이애주 등 서울 지역의 남녀학생 대부분이 참가했고, 고종황제의 인산을 마친 다음 기차 편으로 귀향하려던 지방민들도 대거 합세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일어난 한국인들의 독립만세운동 열기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선총독부는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3월 10일에 이르러 임시휴교령을 반포했다. 주동인 학생들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눈에 불을 켠 경찰과 헌병들은 도심에서 시민 몇몇이 모이기만 해도 곤봉을 휘둘러 해산시켰다. 그 때문에 서울에서의 활동이 한계에 부딪치자 유관순은 동료들과 협의한 뒤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키기로 다짐했다.
   3월 13일, 유관순은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숨겨 들고 천안행 기차에 올랐다. 일제의 삼엄한 검문검색을 피해 고향으로 안착한 그녀는 아버지 유중권의 주선으로 청신학교와 교회를 찾아가 교사와 학생, 신도들에게 서울에서 벌이지고 있는 만세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동참을 호소했다.
   그녀는 또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했다. 이에 대하여 선교사 조인원과 김구응, 이백하 등 20여 명의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함으로써 시위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그들은 수차례의 논의 끝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4월 1일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우선 용두리 지렁이골에 총본부를 두고 장명리와 백전리에 연락기관을 설치한 다음 유림 대표와 집성촌 대표들을 설득했다.
  유관순 열사는 김구웅, 조인원, 유중무, 이백하 선생의 협조와 지도를 받아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천안헌병대에 구금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한편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30여명이 중상을 당했다.
  공주검사국에서 유관순을 심문하던 일경은 그녀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하여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 한 몸 편하자고 부모를 학살한 흉적들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공주검사국에서 갖은 고초를 감내하던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교에 재학 중 만세운동을 벌이다 잡혀온 오빠 유관옥을 만난다. 시위현장에서 부모를 잃고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된 남매는 부둥켜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지만 대한독립의 열망까지 흘리지는 않았다.
   얼마 후 법정에 선 유관순은 일본인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일제의 조선병탄에 대한 부당함을 역설하고 잔인하게 시위를 진압한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잔혹성을 고발했다.
   그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일본인 재판장은 유관순에게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녀가 판결에 항의하여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유관순이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의 여감방 8호실에는 만세 시위를 외치다 잡혀온 여죄수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는 독립운동가 노백린 장군의 딸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였던 노순경, 개성의 전도부인 어윤희, 구세군 사관 부인 엄영애, 정신여학교 학생 이애주 등이 있었다. 유관순의 죄수번호는 1933번이었다.
   그해 5월 11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던 프란시스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프레스 지의 주선으로 서대문형무소 면회실에서 노순경을 만난 다음 옥리를 추궁하여 그녀들의 수감 현장을 둘러보았다. 어둡고 컴컴한 감방 안에서 그는 잔인한 고문으로 얼굴은 물론 온몸이 퉁퉁 부은 애국지사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여리디 여린 소녀 유관순의 고왔던 얼굴 역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유관순에게 징역 3년을 언도했다. 그녀는 재차 형벌의 부당함을 항의했지만 9월 11일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재판과 판결을 전혀 수용할 수 없었던 그녀는 옥중에서 끊임없이 저항했고, 1920년 3월 1일에는 동지들과 함께 옥중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간수들은 골칫거리 유관순을 어둡고 축축한 지하 독방에 감금하고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 기념으로 유관순의 형기가 1년 6개월로 감형되었지만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20년 9월 28일, 유관순은 형기를 3개월 남겨둔 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가 사망하고 나서 이틀 뒤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 시신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이화학당의 모든 외국인 교직원들이 나서서 유관순의 억울한 죽음을 세계만방에 알리겠다고 항의하자 형무소 측은 마지못해 시신을 내주었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다음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1937년 이태원 공동묘지가 택지로 조성되면서 유골이 사라졌고, 그녀의 존재 역시 세인의 뇌리에서 지워졌다가 해방 후인 1946년 갑자기 구국의 영웅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관순 열사는 서훈 3등급에 속하여 역대 대통령의 헌화를 받을 수 없었다. 반면에 안중근 의사는 1등급, 신채호 선생은 2등급을 서훈 받아 역대 대통령의 헌화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천안시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유관순 열사 서훈 상향 조정을 위한 상훈법 개정 촉구 서명 운동을 주관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 서훈 등급 상향 청원 동참 운동은 천안 시민뿐만 아니라 전 국민들 모두에게도 공감을 얻어야만 성공할 수가 있다.
  유관순 열사의 업적과 상징성을 생각할 때 서훈 등급 격상이 당연시 되는데, 현실은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6·13 지방선거로 인해 서훈등급 격상운동이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의 공약화 움직임이나 동참도 눈에 띄지 않는다. 충남도나 충남교육청 등 공무원 사회와 각급 학교들이 나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역시 선거 분위기에 매몰돼 서훈 격상운동 확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제로 (사)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회장 류정우)가 지난 2018년 5월 10일부터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을 통해 20만 명을 목표로 '유관순 열사 서훈등급 격상 운동'을 진행하고 있지만, 30일간의 청원기간 중 반환점을 돈 2018년 5월 27일 현재 1만1000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청와대는 국민청원 20만명이 넘으면 의무적으로 답변하도록 돼 있지만, 현재 20분의 1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리하여 충청남도 여성정책팀과 충남교육청이 유관순 열사의 업적을 기리고 서훈등급을 격상시키고자 국민청원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이에 대해 충청권 시·도민들은 아무리 선거 분위기와 남북간 대형이슈가 있다 하더라도 국민 청원 마감일인 2018년 6월 9일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선은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 또한 각급 학교들이 나서 학생들을 비롯한 그 가족들이 적극 나서 청원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아무튼 항일독립운동사를 조사 연구하는 향토사학자로서 2019년 3·1독립만세운동100주년 기념식에서 '유관순 열사의 서훈 격상 기념식'도 함께 열리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며 청와대 국민청원 마감일 이전에 애국 시민들께서 유관순 열사 서훈격상운동에 적극 참여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호소한다.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신상구

▲     © 편집부


기사입력: 2018/06/08 [07:42]  최종편집: ⓒ 천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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