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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1.17 [20:05]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영웅, 여천 홍범도 장군 74주기를 추모하며
 
신상구

 지난 2017년 10월 25일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영웅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순국한 지 74주기가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여천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자성(慈城:일설에는 평안북도 양덕(陽德) 또는 평양이라고도 함)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갑산(甲山)으로 이사한 뒤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     © 황선영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한 뒤 삼수(三水)·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대적하여 북청(北靑)·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朴永信)으로 하여금 함북 경원(慶源)의 수비대를 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은 1911년에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항일독립투사인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1864~1920) 선생이 스승인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 선생의 감수를 받아 한민족의 정통사서인『환단고기(桓檀古記)』를 발간할 때에 송암(松菴) 오동진(吳東振) 장군과 함께 발간자금을 지원해 주어 지금도 재야 민족사학자들의 존경을 받고 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신라의 고승 안함로(安含老, 579-640)의『삼성기(三聖紀)』(상), 원동중(元董仲)의『삼성기(三聖紀)』(하), 행촌(杏村) 이암(李嵒, 1297-1364)의『단군세기(檀君世紀)』, 범장(范樟)의『북부여기(北夫餘紀)』,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의『태백일사(太白逸史)』를 묶어 하나의 정통사서로 집대성한 것이다.『환단고기(桓檀古記)』는 식민사학자들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왜곡된 우리 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로 특히 단군조선 이전의 잃어버린 우리 역사 즉 환국-신시배달국-단군조선의 실체를 밝혀줄 수 있는 유일한 사서이다. 그리고 인류의 원형문화인 신교문화, 천(天)·지(地)·인(人) 삼재의 가르침, 삼한관경제도(三韓管境制度), 문자문명의 발원처, 상고시대 한민족의 대외 교섭사, 수(數)의 최초 발명 등을 기록하고 밝혀 그 어느 사서보다도 가치가 크다.

홍범도 장군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南陽)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다. 1921년 러시아령(領) 흑하자유시(黑河自由市)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양성에 힘썼으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을 겪은 뒤 이르크츠크로 이동하였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곳에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단법인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홍범도 장군 74주기를 맞이하여 국가보훈처의 후원을 받아 지난 2017년 10월 25일(수)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고궁박물관 별관 강당에서 추모식과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사단법인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종찬 이사장은 지난 2013년 홍범도 장군 70주기를 추모하며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업적이 우리 한민족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을 다음과 소개했다.


   첫째, 홍범도 장군은 양반계급도 아니고 비천한 광부였고,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절을 찾아간 식객승이었고, 포수로서 생활을 이어간 하층계급이었다. 그는 조선왕조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조국이 외세에 의하여 침탈당할 때 분연히 일어나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했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로부터 강제로 해산되자 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궐기하여 즉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의병투쟁은 후에 만주나 극동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 독립군은 국경 지대에서 전투태세를 준비했으며 언젠가는 국내에 진공하여 다시 나라를 찾겠다는 의욕에 불탔다. 홍범도 장군은 이때 독립군의 지휘관으로 맹활약했다.
 

  둘째, 홍범도 장군은 항상 자기를 낮췄다. 의병투쟁은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자연 통일된 지휘체계도 없고, 어떤 명령을 하달할 수 있는 위임된 사령부도 없었다. 의병이나 독립군은 서로 자신들 위주로 사람을 모아 부대를 편성했다. 이로 인해 상호 간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고, 이기적인 종파의식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비범한 인격과 지휘력을 갖추었다. 그는 항일투쟁 전선을 앞에 두고 서로 작은 이해로 싸워 전투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스스로 연합한 부대의 사령관 자리를 피하고, 오히려 그 휘하의 연대장으로서 임무를 맡아 부대를 지휘했다.


   셋째, 홍범도 장군은 뛰어난 전술 능력을 갖추었다. 192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전투에서 열세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정규 사단의 병력과 대적하여 승리를 쟁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뛰어난 부대 지휘 능력과 기발한 전술작전 운영으로 열세를 극복했다. 적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완전히 퇴로가 차단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시에 적을 섬멸하는 그의 탁월한 전술 지휘는 분명히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봉오동 전승이 있었기에 후에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재차 일본군 대부대를 섬멸할 수 있었다.


    1937년 스탈린은 밀려드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대대적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소련 지휘부는 집단 강제이주에 반발하는 고려인 지도급 인사나 군 장교 약 2800명을 숙청했다. 69살의 노인 홍범도 장군은 다행히 학살은 면했지만 이미 울안에 갖힌 늙은 호랑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된 이후 야간에는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하고, 주간에는 정미소의 근로자로 외로운 삶을 살다가 조국의 광복을 바로 눈앞에 둔 1943년 10월 25일 7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카자흐스탄의 한인 동포들은 여천 홍범도 장군을 존경하는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 해마다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행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해마다 여천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추모회와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1982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기자들과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홍범도 장군의 시신을 크질오르다 중앙공동묘역으로 이장했으며,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또 말년에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됐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됐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의 시신은 아직도 고국으로 봉환되지 못해 지금도 카지흐스탄의 크질오르다 묘소에 잠들어 있어 장군을 존경하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이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객관적 평가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김좌진 장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빛을 많이 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신상구/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     © 황선영

 



기사입력: 2017/10/28 [09:27]  최종편집: ⓒ 천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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