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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5.25 [04:03]
집요한 일본의 불독외교에 다시는 물리지 말라!
일본의 끈질긴 대 조선 침략외교
 
장팔현 기자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급격히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막부 말기에 맺어진 외국과의 불평등 조약에 대하여 반성이 일면서 조약개정 움직임이 일었다. 이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일본민족 특유의 자주독립 의식의 눈뜸으로 볼 수도 있다.

 이에 일본정부는 치외법권의 철폐로 독립국가로서의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고, 관세자주권을 회복하여 무역상의 불이익을 제거하고,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를 쌍무화로 바꿈으로써 관세수입의 증가를 목표로 하였다.


 조약개정의 움직임은 점차 실행에 옮겨졌다. 먼저 1871년에 이와쿠라 토모미가 이끈 사절단이 미국에 가 1872년 7월에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을 교섭상대로 거들떠보지도 않은 미국 측의 거부로 첫 교섭은 절망만 뼈저리게 느낀 채 중지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정부는 1878년에 이르러 또다시 외무경 테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를 보내 관세자주권 회복을 위해 교섭한 결과 미국과「미일관세개정약서」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무도회장까지 이용한 대 서양외교

 1883년 일본정부는 히비야(日比谷)공원 옆에 로쿠메이칸(鹿鳴館)을 세워 외국인을 초청, 무도회를 열면서 서양과 대등한 문화를 가진 나라임을 내세우면서 조약개정에 열을 올렸다.


 1886년에는 영국의 화물선이 키이반도(紀伊半島)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침몰, 영국선원 27명은 전원 보트로 탈출했으나 일본인 승객 32명은 전원 익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재판을 맡은 코오베의 영국 영사재판소는 영국 선장이하 전원에게 무죄를 내렸다. 이에 일본 전국에서는 치외법권의 불평등을 들어 조약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그러나 서구의 눈에는 아직도 일본은 약소국이었다. 조약개정을 위한 이러한 일본의 비원은 1889년 서구식 법 개정을 서두르는 계기가 되었고 부국강병에 몰두케 하는 하나의 큰 동인이 되었다.


 일본의 근대화 노력에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894년 영국이 먼저 일본과의 조약개정에 동의하고 치외법권을 폐지하였다. 이 조약이「영일통상항해조약(英日通商航海條約)」이다. 영국이 이처럼 일본의 조약개정에 응한 이유는 일본을 움직여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려는 간계가 숨어있었음은 러일전쟁 시 일본을 적극적으로 도운 일에서도 입증된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과 조약개정을 이루고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미국도 치외법권 철폐에 대한 조약개정에 응해주었다.


 그러나 경제발전에 필요한 관세자주권은 러일전쟁 승리 후 7년이나 지난 1911년에 이르러서야 평등한 조약으로 대체될 수 있었다. 실로 1871년에 불평등한 조약 개정을 위해 이와쿠라가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향한지 꼭 4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처럼 일본은 외교에 있어 한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일본의 대조선 침략외교를 보아도 그들의 끈질긴 외교가 얼마나 집요하고 악착같은 악귀처럼 여겨지는지 한일합방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일찍이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곧바로 1868년 말경부터 키도 타카요시에 의해 정한론이 일었으며, 1875에는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일부러 군함을 서해로 이끌고 와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목적을 위해서 고의적으로 사건을 일으키는 일본외교의 간교한 술책으로 만주사변으로도 입증된다. 즉, 일제가 경제공황 만회와 만주지배 영역을 확대할 목적으로 공격의 빌미를 학수고대하던 중 관동군이 1931년 9월 18일 봉천(현, 심양)교외의 유조호(柳條湖)근처를 통과 중 만철 노선이 공격당해 폭파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관동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만주사변을 일으키니, 이는 일본군 스스로 꾸민 교활하기 그지없는 자작극이었다. 

 일본은 일부러 일으킨 강화도 사건을 빌미로 21년 전 '쿠로부네(黑船:검은 배)‘를 타고 위협적으로 다가 온 페리로부터 학습한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조선에 강요, 미일수호통상조약보다 더욱더 불평등한 강화도조약(1876년)을 강제로 체결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침략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은 임오군란(1882년)으로 인한 일본인 피해배상을 둘러싸고 일본군 주둔(약간 명)을 명문화한 제물포조약을 맺었으며 동학혁명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일의정서(제1차 한일협정서:1894년)를 체결하였으며, 마침내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1905년)으로 조선의 외교마저 좌지우지하더니, 1907년에는 정미조약(내정권<內政權> 장악)체결로 사실상 대한제국을 식물왕국으로 만들었으며, 드디어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조약 체결로 이어져 42년간의 끈질긴 침략외교에 마침표를 찍었다.

 실로 악착스럽고 집요한 끈질긴 침략외교의 종착점은 완전한 한국침탈이었다. 이렇듯 일본의 침략외교는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부단히 끈임 없이 집요한 외교를 펼친다. 일본은 일찍이 페리제독에 의해 불평등조약을 맺게 된 후 이를 고치기 위해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 끝에 목적을 달성한 적이 있다. 이처럼 일본외교는 한 가지 목적달성을 위해 끈질기고 지독하다.


 일본외교는 한 가지 결정된 정책사안을 이루기 위해 끈질긴 외교를 행하며, 외교문서 작성 시에는 애매한 문구(타마무시이로-비단벌레 색깔)로 작성하여 후일 문제가 생길 때는 그 해석이 상반되게 나타난다. 이 또한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치에부꾸로(智慧袋-지혜(꾀)주머니)’일 것이다.  


본정책의 영속성

 인접 일본국은 천황가가 한번도 끊긴 적이 없다는 만세일계라는 허구를 싫든 좋든 믿고 있는데, 이는 신토오(神道)라는 세계화되기 힘든 일본인만의 독특하고 이기적인 민족종교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전후 정치에 있어서도 호소카와, 하타, 무라야마 수상 때를 제외하고는 자민당이 이끌어오고 있다. 무라야마 총리 때에도 사회당과 연립이라는 기묘한 동거로 정권을 지탱하고 있었으니, 무라야마 총리 또한 완전한 사회당정권이라 볼 수 없다.


 일본의 외교는 천황제와 신토오의 영향 탓으로 영속성을 가지며 정권도 잘 바뀌지 않을 뿐더러, 설사 성향이 다른 인물로 바뀐다 하더라도 이미 국책으로 결정된 정책은 후임자에 의해 그대로 계승된다. 반면, 한국에서는 정책의 영속성보다는 단절로 이어지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일례로 사단장이 바뀌면 전임 사단장을 비판하거나 전혀 반대의 길을 걷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는 정치.경제.문화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우리의 약점이다.


 때문에 고려시대의 비법인 청자 제조법이 끊어졌는지도 모른다. 이는 고려나 조선의 관리들이 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법의 전수를 위해서도 장인들을 대우해주고 경제적 이득을 취하게끔 하면서 도자기를 징수해가야 했음에도 이러한 대우 없이 징수만 늘어나니, 자식에게까지 진귀한 기술을 전수함은 착취의 연속이요, 고난이라는 생각에 좋은 기술이 바로 끊어진 것과 같다. 반대로 일본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포로로 데려간 도공들을 대우해주고 경제적 이득을 보장함으로써 도자기 제조기술이 본국 한국보다 더 발전하게 된 것이며, 수십 년 걸쳐 조선통신사가 데려온 포로가 5만여 명 중 겨우 1만여 명에 지나지 않았음이다.


 이들 왜란에 끌려간 하층민 출신 중에는 에도막부 때 출세한 사람도 있어 조선통신사를 따라 돌아왔는데, 통신사로 왔던 전 주인이 쓰시마에 이르러, “너는 조선에 돌아가면 다시 내 종이다.”라고 노비로서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바람에 이러한 소문이 일본에까지 퍼져 많은 하층민들이 조선으로의 귀국을 단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튼 일본외교의 끈질김과 집요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역사로부터 우리는 두 눈 부릅뜨고 일본을 철저히 분석해야한다. 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있으며, 천황제와 신토오가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대 한반도정책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한반도를 고대로부터 현재까지도 일본 안보의 사활이 걸린 가장 중요한 특급 생명선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은 대한외교를 대미, 대중, 대러 외교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시 여기고 있음이며, 우리 통치자가 훌륭하면 한.일간에 평화가 오나, 똑똑치 못한 통치자로 인하여 나라가 분란을 일으키면 언제라도 쌍심지 켜고 달려드는 것이다. 요즘 일본이 부쩍 독도문제를 물고 늘어짐도 시대의 한 단면을 일본이 정확히 포착하고 있음이다. 


 백치와 같은 무뇌아(無腦兒)통치자가 아닌 한 “우리가 변하면 일본도 변할 것이요, 과거사 사죄는 이제 필요 없고 미래만 얘기하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이 바라보는 한반도는 절대로 우리가 순진하게 생각하는 희망사항과는 반대로 일본정책은 항상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이를 역사가 증명하는데도 과거사를 묻지 않음은 스스로 손발 묶고 일본의 처분만 바라는 어리석은 경거망동이다.


 정치나 외교에 있어 침략적이고 확대지향적인 팽창외교로 되돌아선 이웃 일본을 모를 때 우리는 또다시 못난 역사를 되풀이할 수 있음을 위정자와 외교담당자들은 명심하고 또 명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나친 방심과 무사안일로 대일 외교를 취함은 민족과 국가의 불행을 자초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 장팔현 기자는 일본 京都의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원에서 국제관계 석사과정과 문학연구과에서 한일고대사(칠지도, 우전팔번경 등 금석문)를 연구하고 귀국한 문학박사입니다.

 


기사입력: 2005/01/22 [20:51]  최종편집: ⓒ 천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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